You are on page 1of 11

m01 jti_3n0301 C21

莊子(1) 장자(1) ●

범례 해제 참고서목

第 3 篇 養生主 第 3 章
12

(注 1)
 전체서명/저자명기사제목원문/대역문번역문역주기타 公文軒
[역주 1]公文軒
인명. 司馬彪와 成玄英은 姓이 公文이고, 이름이
軒이며, 宋나라 사람이라고 했다. 一說(赤塚忠)에
文軒은 아름다운 장식이 있는 수레이므로 公文軒이란
‘화려한 무늬로 치장된 수레인 文軒을 타고 다니며
富貴榮華를 누리는 사람’을 뜻하는 文軒公을 거꾸로
公文軒이라고 寓意를 담아 표현한 것이라 했는데
적절한 풀이라 할 수 있다.
이 見
(注 2)
右師
[역주 2]右師
春秋時代 宋나라의 官職名. 여기서는 右師로 있다가
刖(월)刑을 받아 외발이 된 사람을 지칭. 林希逸은
“이미 월형을 받고 난 뒤에 우사가 된
사람이다[已刖之人爲右師之官也].”라고 했지만, 현재
우사라는 관직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으로 보기보다는,
우사로 있다가 월형을 당해 세속적인 욕망을 버리고
자유롭게 소요하는 野人이라는 寓意를 담아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하고 而驚曰
(注 3)
是何人也
[역주 3]是何人也
이 사람이 누구인가. 실제로 누구인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본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는데 刖刑을
당하고 난 모습을 처음 보고 놀라서 하는 말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注 4)
惡乎介也
[역주 4]惡乎介也
어찌하여 발이 하나뿐인가. 介는 발꿈치를 베는
형벌인 刖과 通用하는 글자. 임희일은 “介는 獨의
뜻으로 월형을 받아서 한쪽 발만 남아 있는
것이다[介獨也 刖而存一足也].”라고 풀이했다.

(注 5)
天與아 其人與
[역주 5]天與其人與
하늘인가 아니면 사람인가. 하늘이 외발이 되게 한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그렇게 한 것이냐, 즉
인간사회의 형벌을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냐는 질문.
郭象은 “人知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
天이다[知之所無奈何 天也].”라고 풀이했다. 其는 抑
또는 或으로 아니면의 뜻.
아 曰
(注 6)
天也라 非人也
[역주 6]天也非人也
하늘이 이렇게 한 것이지 사람이 이렇게 한 것이 아님.
곧 자신이 월형을 받아 외발이 된 것은 〈비록 형벌을
내린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기실은 그 사람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라는 의미. 《孟子》
〈梁惠王 下〉에서 孟子가 제자 樂正克의 소개로 魯
平公을 만나려 하다가 臧倉의 방해로 만나지 못하게
되자, “가서 만나도록 한 것도 누군가가 그렇게 시킨
사람이 있고, 중지하는 것도 누군가가 방해한 사람이
있을 터이지만, 막상 가고 중지하는 것은 사람이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노나라 임금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장씨의 자식이 어찌 나로
하여금 만나지 못하게 했겠는가[行或使之 止或尼之
行止非人所能也 吾之不遇魯侯天也
臧氏之子焉能使予不遇哉].”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니라
(注 7)
天之生是 使獨也
[역주 7]天之生是 使獨也
하늘이 나를 낳으심에 외발이 되게 함. 즉 처음
태어날 때는 두 다리였지만, 언젠가는 내 다리 하나가
잘리도록 한 것이 하늘의 뜻이라는 의미. 是는 右師가
스스로를 지칭하는 대명사. 獨은 외발. 司馬彪는
“외발을 獨이라 한다[一足曰獨].”고 풀이했다.
로다
(注 8)
人之貌는 有與也
[역주 8]人之貌有與也
사람의 용모는 하늘이 부여한 것임. 與는 天賦의 뜻.
有與에 대한 풀이는 참여한다는 뜻으로 보는 견해와
부여한다는 뜻으로 보는 견해로 엇갈리고 있다.
곽상이 “두 발로 걷는 것을 有與라
한다[兩足共行曰有與].”라고 주석한 이래, 林希逸 등이
이 견해를 따르고 있는데, 陸西星, 馬其昶, 釋德淸,
劉武, 陳鼓應, 池田知久 등은 모두 〈德充符〉편의
‘道與之貌 天與之形(도는 용모를 주었고 하늘은 형체를
주었다)’이라는 구절에 근거하여 有與를 “하늘이
부여하였다.”는 뜻으로 보았다. 여기서는 뒤의 견해를
따랐다.

(注 9)
以是로 知其天也라 非人也
[역주 9]以是知其天也 非人也
이로써 내가 외다리 된 것이 하늘 〈자연〉의 탓이고
인위의 탓이 아님을 알겠노라. 이 문장 역시 郭象
이래의 說에 따르면, “두 다리로 걷게 되어 있음이
天이라면 한 다리로 걷게 되는 것도 天命이고 人爲가
아님을 알 수 있다.”로 번역될 수 있지만, 택하지
않는다.
하노라
(注 10)
澤雉
[역주 10]澤雉
못가의 꿩, 못가에 서식하는 꿩. 이하의 내용
‘澤雉……不善也’는 장자가 스스로 한 말이고 右師의
말이 아니라고 하는 견해(安東林)가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의 내용은 화려한 생활을 하는 公文軒을 새장
속에 갇혀 자유를 박탈당하고 사는 새로 빗대서
무시하고 야유하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에 우사가
직접 한 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林希逸과 郭慶藩
모두 우사의 말로 보았다.
(注 11)
十步에야 一啄하며 百步에야 一飮
[역주 11]十步一啄 百步一飮
열 걸음 만에 한 입 쪼아 먹으며, 백 걸음 만에 한
모금 마심. 十步는 十步而後, 百步는 百步而後.
호대
(注 12)
不蘄畜乎樊中
[역주 12]不蘄(기)畜(휵)乎樊中
새장 속에서 길러지기를 바라지 않음. 蘄는 바라다는
뜻. 樊은 새장[鳥籠]. 구속이 많은 宮廷이나 貴族
高官의 生活을 빗댄 표현. 崔譔은 樊中을
園中(王公들의 동산)이라고 했지만 園은 비교적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새장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하나니
(注 13)
神雖王이나 不善也
[역주 13]神雖王不善也
神態는 비록 왕성해질 테지만 〈새의 본성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음. 王은 長王의 뜻(郭象)으로 旺盛하다는
뜻. 새장 속에는 먹이가 충분하기 때문에 정신이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神態]은 비록 왕성해지더라도
자유를 박탈당하고 사는 것은 새의 본성에 맞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 淸 林雲銘이
저술한 《莊子因》의 해석이 적절하다. 그런데 神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석이 있다. 王叔岷은
神態(정신이 겉으로 드러난 모습, 정신적인 태도)로
풀이하였는데 매우 적절한 견해이다. 褚伯秀는 神을
形의 誤字로 보아 몸은 비록 왕성해지겠지만으로
보았고, 安東林은 神을 기력으로 보고 “기력은
왕성하지만 마음이 즐겁지 않다.”고 풀이하여, 기력과
정신의 대비로 보았지만 적절치 않다. 또 이 구절을
“새가 연못에서 자유롭게 살면 그것이 새의 본성에 꼭
맞기 때문에 정신이 비록 왕성해져도 그것이 좋은
것인 줄 깨닫지 못한다.”는 뜻으로 풀이하는 주석(郭象,
成玄英)도 있지만 역시 부적절하다. 한편 王을 旺으로
보지 않고 王公의 권력의 의미로 풀이한 주석(赤塚忠,
池田知久)도 있지만 취하지 않는다. 한편 朴世堂은
“새가 새장 속에서 길러지기를 바라지 않는 것은
육체는 비록 왕성해지더라도 신은 좋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雉不求養於樊籠之中者 形雖旺澤
而神固不以爲善故也].”라고 했는데, 이 견해는
神雖王不善也를 “정신(神)은 비록 몸이 왕성해져도
그것을 좋게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로 보고, 神이
좋지 않게 여기는(不善)의 주체이고, 王은 육체가
旺盛하다는 의미로 풀이한 것이다. 박세당의 이
견해는 글자를 바꾸지 않고도 맥락에 맞는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참고할 만하다.
하나니라

公文軒이 右師를 만나보고 놀라서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이 누구인가? 어찌하여 발이 하나뿐인가? 하늘이 그렇게 한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그렇게 한 것인가?”

우사가 말했다.

“하늘이 이렇게 한 것이지 사람이 이렇게 한 것이 아니다. 하늘이 나를


낳으심에 외발이 되게 한 것이다. 사람의 용모는 다 하늘이 부여한 것이다.
이로써 내가 외발이 된 것은 하늘이 그렇게 한 것이지 사람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못가에 사는 꿩은 열 걸음 만에 한 입
쪼아먹으며, 백 걸음 만에 한 모금 마시지만 새장 속에서 길러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神態는 비록 왕성해질 테지만 〈새의 본성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주
역주 1 公文軒 : 인명. 司馬彪와 成玄英은 姓이 公文이고, 이름이 軒이며, 宋나라

사람이라고 했다. 一說(赤塚忠)에 文軒은 아름다운 장식이 있는 수레이므로


公文軒이란 ‘화려한 무늬로 치장된 수레인 文軒을 타고 다니며 富貴榮華를 누리는
사람’을 뜻하는 文軒公을 거꾸로 公文軒이라고 寓意를 담아 표현한 것이라 했는데
적절한 풀이라 할 수 있다.

역주 2 右師 : 春秋時代 宋나라의 官職名. 여기서는 右師로 있다가 刖(월)刑을 받아

외발이 된 사람을 지칭. 林希逸은 “이미 월형을 받고 난 뒤에 우사가 된


사람이다[已刖之人爲右師之官也].”라고 했지만, 현재 우사라는 관직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으로 보기보다는, 우사로 있다가 월형을 당해 세속적인 욕망을 버리고 자유롭게
소요하는 野人이라는 寓意를 담아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역주 3 是何人也 : 이 사람이 누구인가. 실제로 누구인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본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는데 刖刑을 당하고 난 모습을 처음 보고 놀라서 하는 말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역주 4 惡乎介也 : 어찌하여 발이 하나뿐인가. 介는 발꿈치를 베는 형벌인 刖과

通用하는 글자. 임희일은 “介는 獨의 뜻으로 월형을 받아서 한쪽 발만 남아 있는


것이다[介獨也 刖而存一足也].”라고 풀이했다.

역주 5 天與其人與 : 하늘인가 아니면 사람인가. 하늘이 외발이 되게 한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그렇게 한 것이냐, 즉 인간사회의 형벌을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냐는


질문. 郭象은 “人知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 天이다[知之所無奈何 天也].”라고
풀이했다. 其는 抑 또는 或으로 아니면의 뜻.

역주 6 天也非人也 : 하늘이 이렇게 한 것이지 사람이 이렇게 한 것이 아님. 곧

자신이 월형을 받아 외발이 된 것은 〈비록 형벌을 내린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기실은 그 사람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라는 의미. 《孟子》 〈梁惠王
下〉에서 孟子가 제자 樂正克의 소개로 魯 平公을 만나려 하다가 臧倉의 방해로
만나지 못하게 되자, “가서 만나도록 한 것도 누군가가 그렇게 시킨 사람이 있고,
중지하는 것도 누군가가 방해한 사람이 있을 터이지만, 막상 가고 중지하는 것은
사람이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노나라 임금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장씨의 자식이 어찌 나로 하여금 만나지 못하게 했겠는가[行或使之 止或尼之
行止非人所能也 吾之不遇魯侯天也 臧氏之子焉能使予不遇哉].”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역주 7 天之生是 使獨也 : 하늘이 나를 낳으심에 외발이 되게 함. 즉 처음 태어날

때는 두 다리였지만, 언젠가는 내 다리 하나가 잘리도록 한 것이 하늘의 뜻이라는


의미. 是는 右師가 스스로를 지칭하는 대명사. 獨은 외발. 司馬彪는 “외발을 獨이라
한다[一足曰獨].”고 풀이했다.

역주 8 人之貌有與也 : 사람의 용모는 하늘이 부여한 것임. 與는 天賦의 뜻. 有與에

대한 풀이는 참여한다는 뜻으로 보는 견해와 부여한다는 뜻으로 보는 견해로


엇갈리고 있다. 곽상이 “두 발로 걷는 것을 有與라 한다[兩足共行曰有與].”라고
주석한 이래, 林希逸 등이 이 견해를 따르고 있는데, 陸西星, 馬其昶, 釋德淸, 劉武,
陳鼓應, 池田知久 등은 모두 〈德充符〉편의 ‘道與之貌 天與之形(도는 용모를 주었고
하늘은 형체를 주었다)’이라는 구절에 근거하여 有與를 “하늘이 부여하였다.”는
뜻으로 보았다. 여기서는 뒤의 견해를 따랐다.
역주 9 以是知其天也 非人也 : 이로써 내가 외다리 된 것이 하늘 〈자연〉의 탓이고

인위의 탓이 아님을 알겠노라. 이 문장 역시 郭象 이래의 說에 따르면, “두 다리로


걷게 되어 있음이 天이라면 한 다리로 걷게 되는 것도 天命이고 人爲가 아님을 알 수
있다.”로 번역될 수 있지만, 택하지 않는다.

역주 10 澤雉 : 못가의 꿩, 못가에 서식하는 꿩. 이하의 내용 ‘澤雉……不善也’는

장자가 스스로 한 말이고 右師의 말이 아니라고 하는 견해(安東林)가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의 내용은 화려한 생활을 하는 公文軒을 새장 속에 갇혀 자유를 박탈당하고 사는
새로 빗대서 무시하고 야유하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에 우사가 직접 한 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林希逸과 郭慶藩 모두 우사의 말로 보았다.

역주 11 十步一啄 百步一飮 : 열 걸음 만에 한 입 쪼아 먹으며, 백 걸음 만에 한 모금

마심. 十步는 十步而後, 百步는 百步而後.

역주 12 不蘄(기)畜(휵)乎樊中 : 새장 속에서 길러지기를 바라지 않음. 蘄는 바라다는

뜻. 樊은 새장[鳥籠]. 구속이 많은 宮廷이나 貴族 高官의 生活을 빗댄 표현. 崔譔은


樊中을 園中(王公들의 동산)이라고 했지만 園은 비교적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새장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역주 13 神雖王不善也 : 神態는 비록 왕성해질 테지만 〈새의 본성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음. 王은 長王의 뜻(郭象)으로 旺盛하다는 뜻. 새장 속에는 먹이가 충분하기 때문에


정신이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神態]은 비록 왕성해지더라도 자유를 박탈당하고 사는
것은 새의 본성에 맞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 淸 林雲銘이
저술한 《莊子因》의 해석이 적절하다. 그런데 神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석이 있다.
王叔岷은 神態(정신이 겉으로 드러난 모습, 정신적인 태도)로 풀이하였는데 매우
적절한 견해이다. 褚伯秀는 神을 形의 誤字로 보아 몸은 비록 왕성해지겠지만으로
보았고, 安東林은 神을 기력으로 보고 “기력은 왕성하지만 마음이 즐겁지 않다.”고
풀이하여, 기력과 정신의 대비로 보았지만 적절치 않다. 또 이 구절을 “새가 연못에서
자유롭게 살면 그것이 새의 본성에 꼭 맞기 때문에 정신이 비록 왕성해져도 그것이
좋은 것인 줄 깨닫지 못한다.”는 뜻으로 풀이하는 주석(郭象, 成玄英)도 있지만 역시
부적절하다. 한편 王을 旺으로 보지 않고 王公의 권력의 의미로 풀이한 주석(赤塚忠,
池田知久)도 있지만 취하지 않는다. 한편 朴世堂은 “새가 새장 속에서 길러지기를
바라지 않는 것은 육체는 비록 왕성해지더라도 신은 좋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雉不求養於樊籠之中者 形雖旺澤 而神固不以爲善故也].”라고 했는데, 이
견해는 神雖王不善也를 “정신(神)은 비록 몸이 왕성해져도 그것을 좋게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로 보고, 神이 좋지 않게 여기는(不善)의 주체이고, 王은 육체가
旺盛하다는 의미로 풀이한 것이다. 박세당의 이 견해는 글자를 바꾸지 않고도 맥락에
맞는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참고할 만하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페이지다음페이지

 맨위로
 이메일
 평가

jti_3n0301 C21
★★★★★ ★★★★ ★★★ ★★

명문장 추천하기평가

http://db.cyber jti_3n0301 C21

You might also like